자유로운 영혼이란 사실 없는 게 아닐까?
우리는 늘 어떤 시대, 어떤 지역, 어떤 사회집단에 속해 있으며 그 조건이 우리의 견해나 느끼고 생각하는 방식을 결정한다. 사실 보면 우리는 생각만큼 자유롭거나 주체적으로 살고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대부분의 경우 자기 집단이 수용한 것만 선택적으로 보거나, 느끼거나, 생각하기 마련이다. 온갖 갈등의 진원지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집단이 무의식처럼 배제하고 있는 것은 애초부터 우리의 시야에 들어 올 일이 없다. 또한 우리의 감수성과 부딪히거나 우리가 하는 사색의 주제가 될 수 없다.
우리는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하는 ‘자율적인 주체’라고 믿고 있지만 사실, 그 자유나 자율성은 상당히 제한적이다.
이것이 자유나 자율성을 상당히 제한적이라는 사실을 파헤쳐 온 것이 구조주의 성과다.
옷을 한 벌 사러가도 어떤 옷을 고를까에 대한 결정에서 우리는 어느 누군가가 입고 있었던 생각이 떠오르고, 연예인의 패션도 반영이 될 것이며, 광고 또한 나의 결정에 힘을 보탠다. 이처럼 내 자유에 의해 선택했다지만 돌아보면 거의 모든 부분들이 맞닿아 있다.
발명도 마찬가지다. 이전의 과학자들이 어렵게 찾아낸, 지금은 공론화 되어진 어떤 사실을 전제로 하여 연구가 시작되는 것이다.
사진출처,한겨레, 83년만에 발견한 소쉬르의 육필원고와 페르디낭 드 소쉬르
자유로워 보이지만 분명 누군가는 먼저 간 길이고 그 모방에 지나지 않는다. 만약 모방이 아니라면, 내가 속해있는 집단_조직,뢰사,학교,연구소 등)으로 하여 나의 판단과 행동이 규정된다.
내가 만든 조직이지만 결국 그 조직이 나의 언행을 결정하는 것이다.
하나 더, 아예 남의 얘기를 들으려 하지 않는 안하무인격의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자신이 생각한 대로만, 믿고 싶은 대로만으로 믿는다. 그러나 이것 또한 자신이 믿고 있는(싶은) 대로만 믿는 것(그 자체만을 믿는다에) 규정된다.
‘시스템’이니 ‘매뉴얼’이니 이런 말들이 그것들이다.
‘그래도 대학은 가야지!’ “남자는 군대를 갔다 와야 어른이 되지! ‘ 등등 이런 규정은 도대체 누가 정한지도 모르고 나의 뇌리에 세뇌되어 대물림 되고 있다.
어쩌면 ‘시스템, 커리큘럼, 매뉴얼’ 등의 말이 지긋지긋하다'는 사람이 많아질 때 구조주의 종말이 시작되는 것은 아닐까.
헤겔, 마르크스, 니체, 프로이트에서부터 산업사회와 버무려지면서 본격적으로 등장 하였다.
구조주의의 창시자를 ‘페르디낭 드 소쉬르’(1857~1913)라고 보는 견해가 주를 이룬다.
소쉬르는 언어학자이자, 기호학자이며 사상가이다.
그는 “이름이 명명되고 나서야 비로소 사물이 존재한다. 그러면 ’명명되기 이전에 ‘이름을 갖지 못한 것’은 실재하지 않는다.” 그 후, 미셀푸코, 레비스트로스, 자크 라캉, 롤랑 바르트 등 20C 프랑스 철학의 부흥은 구조주의 사상가들이 주도하게 된다.
김춘수님의 ‘꽃“이라는 시에서처럼
꽃
김춘수
내가 너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언어의 마력은 이런 것이며, 여기서 언어학, 기호학, 상징 등이 구체화 되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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