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기/인물

음악과 미술을 하나로 만든 혁명가. 칸딘스키

von3000 2018. 5. 6. 1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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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한 색!

추상적인 형상!

추상화 탄생! 미술사의 혁명!

러시아인 바실리 칸딘스키 이야기다.

러시아인 칸딘스키의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는 작품!

인생의 희로애락이 표현되어 있다.

 

바실리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 1866~ 1944)는 러시아 태생의 화가로 독일 표현주의의 전형인 청기사파를 결성한 인물이다.
1866년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태어난 칸딘스키는 모스크바 대학교에서 법학과 경제학을 공부했으며, 서른 살이 되던 당시에 성공적인 법학자로 자리를 잡고 있었다.
내가 칸딘스키를 처음 접한 것은 바로 아래 그림이다.

 

칸딘스키 구성8

칸딘스키, 구성8, 1923

 

높이 솟아오르는 선은 빠르고 경쾌한 리듬을 느끼게 하며, 부드럽고 완만한 선은 조용한 리듬을 주며, 색상중의 색조는 음색을 나타내는 것이고 채도는 음의 크기를 표현하고 있다.

법학자의 길을 걷고 있던 칸딘스키에게 변화가 일생일대의 최고의 터닝 포인트 지점이 발생한다. 바로 탄호이저니벨룽겐의 반지로 유명한 독일 낭만주의 작곡가 리하르트 바그너(Richard, Wagner, 1813~ 1883)의 오페라 로엔그린’(결혼행진곡으로 사용하는 신부의 합창은 로엔그린의 삽입곡이다) 공연이 1895년 모스크바에서 있었는데, 이 때 오페라 공연은 칸딘스키는 엄청난 감동과 환희를 덮쳐옴을 느꼈다. 피할 수 없는 그 무엇을 말이다.

이는 음악과 미술의 합체! 비슷하면서도 말로서, 실천으로서 감히 그 누구도 흉내조차 내지 못하는 이 예술 혁명이 칸딘스키에서부터 시작된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칸딘스키는 바그너의 음악을 감상하면서 선과 색 같은 회화에 대한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바그너 또한 여러 예술가에게 많은 영향을 끼친 것을 보면 바그너의 통합예술의 그 어떤 포인트 지점을 준 것이다. 니체도, 칸딘스키도 심지어는 미술학도였던 히틀러에게마저도 상당한 영향력을 미친 건 분명하다.

실제 바그너는 특정인만을 위한 음악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을 위한 종합예술을 꿈꾼 인물로 음악을 중심으로 하여 회화를 포함한 각종 예술을 종합하고자 했고, 그러한 노력으로 낭만파 가극을 완성할 수 있었다.

또한 같은 해 러시아에서 열린 프랑스 인상주의 전시회에도 참석을 한다. 이 때 시시각각 형형색색 변하는 것을 그린 클로드 모네의 건초더미 연작을 보고 색채만으로도 사람의 감정을 이끌어낼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로서 칸딘스키는 대학에서 제안한 법학과 교수직을 거절하고 화가의 길을 걷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당시 러시아는 로마노프 왕조의 마지막 황제인 니콜라스 2세의 구체제 속에 시대의 흐름에 맞지 않는 제국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칸딘스키는 1896년 아내와 함께 독일 뮌헨으로 건너가서 아즈베 미술학교에서 그림 공부를 시작했다. 그리고 뮌헨으로 간다. 칸딘스키가 뮌헨을 택한 이유는 당시 뮌헨에는 아방가르드(Avant Garde, 前衛 예술) 화가들이 모여서 새로운 예술을 탄생시키려 노력을 하고 있던 장소였기 때문이었다.


 

청기사파 칸딘스키

칸딘스키, 구상3, 1909


자유로운 필치의 점과 색띠로 뒤덮음으로써 추상을 탐험하고 있다.
1910년에 그린 구상2’에서는 칸딘스키의 작품이 추상으로 진행되어 가는 과정을 볼 수 있다.

이 작품은 아쉽게 2차 세계대전 때 히틀러에 의해 소실되지만, 이 시기부터 칸딘스키는 그림을 즉흥, 인상, 구성 시리즈로 나누어서 그리기 시작한다. 작품에 번호를 부여하는 것은 클래식 음악에 번호를 붙이는 것과 같은 개념으로 이해하면 된다.
1911년 칸딘스키는 12음 기법을 창안한 오스트리아의 작곡가 아널드 쇤베르크의 현악 4중주를 듣고 다시 한 번 감동을 받게 된다.
조성이 없는 불협화음들이 만들어 내는 음악을 듣고, 음악에 대한 감상을 시각적으로 표현한 작품이 인상 3’이.

 

칸딘스키 인상3

칸딘스키, 인상3, 1911

 

위 그림에서 검정색은 피아노이고, 노랑색은 감동의 색채 표현이다.

아노에서 뿜어져 나오는 음악을 시각화 하면서 추상의 세계로 한 걸음 더 들어간 것이다.
칸딘스키의 작품이 완전 추상으로 돌입한 작품은 1911년에 그린 원이 있는 그림이다.

하지만, 당시에 추상 작품들이 환영을 받을 리 없었다. 1911년 칸딘스키는 뮌헨에서 프란츠 마르크(Franz Marc, 1880~ 1916)와 함께 아방가르드 모임인 청기사파를 결성한다.
청기사파는 예술가의 다양한 내적 표현을 추구하며 독일 표현주의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1911년부터 1914년까지 4년이 채 안 되는 기간 동안 이들은 두 번의 전시회를 개최하고 단 한 차례의 예술연감 청기사’(1912)를 발행한 것을 끝으로 이들의 활동은 정리되었다.

1914년에 발발한 제1차 세계대전은 칸딘스키에게도 큰 시련을 주었다. 이 시기에 많은 역작들을 쏟아내게 된다,

영혼은 현이 있는 피아노이다. 예술가는 영혼의 울림을 만들어내기 위해 건반 하나하나를 누르는 손이다.”

에술에서의 정신적인 것에 대하여

천재적인 사람들에게서 자주 엿보이는 가벼움이 드러난다. 아름답고 재능 있는 여성 화가였던 11살 어린 가브리엘 뮌터와의 사랑을 져버린다. 5년간 동거를 하고, 기다렸는데.... 그녀는 평생 칸딘스키의 그림을 지키며 그리워하다 85세에 세상을 떠난다.

누구들은 추상화의 대표를 피카소라고 불리워 지는 것에는 전적으로 동의 한다. 바실리 칸딘스키는 추상화의 시작이며, 음악과 미술이 하나가 되어가는 것을 논리적으로 설명한 이론가였다. 또한 이를 실천에 옮긴 혁명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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