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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폴 사르트르와 시몬느 드 보봐르의 사랑

von3000 2018. 3. 29. 0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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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서로를 사랑하고 관계를 지키는 동시에 다른 사람을 우연히 만나 사랑에 빠지는 것을 인정한다.

둘째, 서로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으며 숨기지 않는다.

셋째, 경제적으로는 서로 독립된다.

내용은 실존주의 두 거장! 철학자이면서 문학가인 장 폴 사르트르와 시몬느 드 보봐르의 계약결혼 내용이다.

 

장 폴 사르트르는 2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7살때부터 오른쪽 시력을 잃고 사시가 된다. 160cm의 작은 키에 지독한 골초, 쇳 소리나는 목소리, 외모는 볼품없었지만, 사색이 깊고 해박한 지식, 유머, 불같은 정열과 재치의 소유자다,

1929년 까다로운 교수 자격 시험 중에 두 사람은 운명적으로 만난다. 이 시험에서 사르트르는 수석으로 시몬느 드 보봐르는 차석으로 합격한다. 특히 보봐르는 고등사범학교 출신이 아닌 소르본느대학 출신으로 여성이며, 최연소자이어서 단번에 프랑스 사회를 휘어잡는다.

시몬느 드 보봐르

  Act now, without delay, 시몬느 드 보봐르

 

그러나 보봐르 부모의 강력한 결혼 반대로 사르트르의 청혼을 거절 할 수밖에... 그렇지만 보봐르를 놓치고 싶지 않던 사르트르는 2년간의 계약결혼을 제안한다. 이것은 그 때의 프랑스사회에선 파격이었으며, 엄청난 파장을 일으킨다. 다시 2년뒤 프랑스의 남쪽 끝과 북쪽 끝으로 발령이 나는 바람에 서로 헤어지게 되는데, 다시 청혼해보지만 보봐르는 거절한다. 이에 사르트르는 30살까지로 계약을 연장하고 수락한다. 장 폴 사르트르와 시몬느 드 보봐르는 이후 계약결혼 갱신은 없었지만 51년간을 함께 지낸다.

 

사르트르와 보봐르

사진출처,자주가던카페

 

동거는 현실적으로 뜻이 이루어진 남녀의 합방 생활이라면 계약 결혼은 일종의 구두로 협의를 이룬 상태를 말한다. 그들의 계약결혼은 청춘 남녀가 결혼하기 전에 하는 단순한 실험 결혼과는 달리, 사르트르와 보봐르의 경우는 이들과 다르다.

2차대전 후 사르트르와 보봐르를 모델로 한 계약결혼의 붐이 일어 났지만, 이 둘은 철학적인 사유를 바탕으로 새로운 인간관계를 창조하는데 있었다. 사실, 지금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계약결혼이란 말보다도 새로운 가족의 탄생이란 이름으로(성적인 부분을 빼고서도) 이미 더 많이 우리 속으로 들어와 있다.

 

 

 사르트르, 보봐르와 체게바

 

 

  사르트르와는 달리 시몬느 드 보봐르는 왜 정식결혼을 주저했을까? 이는 보봐르가 꿈꾸던 내용만으로도 충분히 예견된다. 그녀가 살던 시대는 여성들이 육아와 가사를 전담하던 시대다. 물론  슬픈 일이지만 지금도 똑같다. 그녀는 자녀양육과 가사노동에 빠져 자신의 꿈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책을 많이 읽고 연구하고 토론하며, 또 다시 글을 쓰는 삶을 꿈꿨다. 너무나도 정확하게 들어맞는 보봐르의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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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르트르가 말하는 이상적인 사랑은 둘 다 가장 주체적인 상태에서 맺는 관계로 본다. ‘의 구분을 없애고 우리로 되게 하는 것이 사랑의 목표라 한다. 사르트르는 평생 보봐르에게 존대말을 사용한 것도 이 하나의 주체적인 인격체로 봤기 때문이다. 난 여기서 두 사람의 계약결혼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주체적 인간들의 아름다운 사랑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사르트르는 내가 보봐르를 만났을 때 그 어떤 누구를 맍났을때보다 가장 편안한 인간관계였다.”

그럼에도 위기는 온다. 각자가 갖고 있는 여성편력, 남성편력, 동성애 등 우연인 듯 불쑥불쑥 다가오는 타인들도 있다. 한창 혈기 왕성한 청춘들이지 않는가? 이 시대 프랑스의 사회를 보면 특히 지식인층에서 자유연애가 많이 퍼져 있었던 같다. 다른 이들의 자서전, 전기, 사회적 이슈 비평을 봐도 누가 언제 이혼하고 친구인 누구의 부인과 3년 뒤 재혼을 하고 말년에는 또 누가 그의 임종을 지켰다라는 문장들을 참 많이 봤었다.

불려진 부분이다 하더라도 성풍속도에선 우리나라 고려시대랑 거의 비슷한 모습이었을 것이다. 이것으로 사르트르와 보봐르의 삶을 폄하할 생각은 전혀 없다. 이들은 스스로의 주체적 삶을 실현하는 것이며, 실존주의가 2차대전 후 다 사라졌다고 해도, 요즘에도 "난 나야!" 같은 이야기들이 삶 속 곳곳에 스며들어 있다.

 

사진출처,행복한서재

 

여러 가지 위기속에서 사르트르와 보봐르는 끝까지 둘의 관계를 유지해나간다.

1970년초, 수 십년 동안 술, 담배, 마약의 남용으로 실명을 하였으며, 뒤에는 1980폐수종으로 사망한다. 보봐르의 손을 잡고 장 폴 사르트르는 나는 당신을 너무나 사랑하오라는유언을 남긴다. 6년 뒤 시몬느 드 보봐르도 사르트르를 따라간다. 그녀는 가족공동묘지에 매장하지 말고 몽파르나스 묘지 사르트르 옆에 묻히기를 원한다. 사르트르가 영원히 자기 곁을 떠나지 않을 것이란 것을 확신한 때문일까?    보봐르도 자신의 회고록에서 나의 삶속에서 가장 성공한 것은 문학작품들이 아니라 사르트르와의 관계이다라고 표현한다.

 

노벨상 거부하는 사르트르

사진출처,Novelprie.org,노벨상 수상거부하는인터뷰

 

 

 

행동하는 지식인의 상징 실존주의 철학자이자 작가, 알베르 카뮈와도 논쟁을 하며 친한 라이벌로서 관계를 쌓아오던 사르트르! 기자들로부터 1964년 노벨문학상 수상소식을 거리에서 듣고는 그 자리에서 수상 거부를 밝힌다. 노벨상이 너무 서구 유럽 경향으로 간다” 우와!!!  세계가 뒤집어진다. 바로 이 사람이 실존주의 철학과 문학의 선구자인 장 폴 사르트르다.

 

여자는 여자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여자로 길러지는 것이다라는 확고한 페미니즘의 이정표를 2의 성‘이란 책에서 보여준다. 이 사람이 시몬느 드 보봐르다.

 

사진출처,구랭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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