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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혜린과 문학소녀들. 백장미, 소피 숄의 마지막 날들

von3000 2019. 1. 4. 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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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죽기 전날,

그녀는 친구, 선배 문인들과 함께 술을 마시던 중간에 자꾸 누구에겐가 전화를 해서 화를 낸다.

또 그립다고도 한다.

그 술자리엔 '무진기행'을 쓴 김승옥도 있었다.

그녀는 계속 그러면서도 2차를 가자고, 3차를 가자고 한다.

 

이어지는 시간에 부담을 느낀 다른 이들은 다들 집에 가겠다고...

하나, 둘 일어서기 시작하고 정말 어쩔 수 없게 됐을 때......

괜찮아!’ 하면서 쓸쓸하게 돌아서던 검은색 정장! 그 뒷모습이 마지막이었다.

그 뒤로 며칠이 지나고 '무진기행'의 작가 김승옥은

다음 날 죽었다는 얘길 듣는다.

그 녀는 전혜린이다.

 

수면제 과다복용으로 자살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사실 증거는 없다.

1965117일자 조선일보 5면에는 '심장마비'라고 되어 있는 것 뿐이다.

 

그 뒤로 이어지던 전혜린에 대한 비평과 심지어는 음해까지도 사후에 등장한다.

자살때문에 미화되고 과대평가된  상류층 출신의 나약한 작가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게다가 독일에서 가톨릭 세례를 받고도 어린 딸을 두고 자살(?) 했다니...

사실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보면 전혜린은 당시 극심한 우울증이지 않았을까 추측한다.

 

 

 

 

그 당시

요절한 천재전혜린(1934~65)은 하나의 청춘 아이콘이었다.

특히 문학소녀들에게는 지금의 아이돌이었을 거야. 아마.

당시 서구 문화에 대한 동경과 판타지를 넘어, 긴 코트를 걸치고 담배 한 가치를 물며 마로니에 공원을 걸어가는 모습은 분명 모든 문학소년, 소녀들에게는 엄청난 자극이었으며 매혹적인 청춘의 감각을 담은 그의 글은 치명적이었다.

당시 사회는 그런

전혜린이 암 덩어리였을 것이다.

슬픔과 고뇌!

여성의 자유로움의 대명사! 전혜린!

 

지식인 남성뿐 아니라

심지어는 고등교육을 받은 여성들까지 자의식 과잉, 지적 허세로 뭉친 미숙한 문학소녀라며 전혜린을 하나의 스쳐 지나가는 스캔들로 소비하거나 비판하는 행렬에 동참하기도 했다.

왜 전혜린과 문학소녀들은 한국 사회에 불편한 존재가 되어야만 했을까.

 

현재 시점에서 전혜린을 비판적으로 조롱하는 시각들. 어느 부잣집 딸의 교양 있는 척하는 공주이며 그의 코스프레라는 시각은 어느 정도 시대적·공간적 배경을 검토하며 교정되어야만 한다.

지난 전혜린에 대한 50여년 동안의 택도 없는 비평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이들이 늘고 있다.

있는 그대로의 인간 전혜린을 기리며...

전혜린의 생애와 글에 대한 사실(팩트)과 당시 시대상을 낱낱이 파헤친다.

 

 

 

 

 

당시 ‘신여성’라는 이름들에게 가해져 온 남성 지식인 사회의 조롱, 비난들!

그 속에서 잉태된 불공정하고 불편한 시선을 이제는자세히 살펴봐야 한다. 이 들은 여성 문인 또는 여성 지식인이 한낱 부르조아적 속물로 손쉽게 평가 절하되는 과정을 가감없이 뒤집으며 이야기 한다.

전혜린으로 대표되는 문학소녀는 왜 아직도 Mee-Too의 싸움속에서 남자 문인들의 동지가 아닌 대상으로 되는지에 대해 질문하지 않았던 한국 사회의 초라한 단면이다. 또한 지금은 전혜린으로 대표되는 ‘신여성문학소녀들에 대한 진지한 변론들이 절실하고 그렇게 나아가고 있다.

전혜린의 유학 일기 곳곳에서는 뮌헨에서의 유학생활에 대한 회고가 담겨 있다.

앳된 임신부로서 만삭의 몸으로 고단한 가사노동을 이어간다.

가난과 노동의 피로와 불안과 우울이 교차하며 점령한 듯 하다. 번역과 집필 노동을 쉬지 않았던 전혜린에게

땀과 노동을 모른다는 비판들!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여성에 대한 의도적인 폄하가 아닐까.

남성 지식인도 그렇지만 여성 지식인 사이에서

아직도 전혜린에 대한.... 여성이라는 것에 대한....기반에 둔다는 것은 바로 평가절하라는 쌍피들을 바닥에 깔고 시작하고 있는 것과 같다.

 

그림자 노동 대한 전혜린의 명백한 기록은 한국 문학계와 지식인들 속에서 진정성 있는 진술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1950~60년대 일본어 번역을 거치지 않고 <데미안> <생의 한가운데>를 비롯한 현대 독일 문학을 직접 서구의 언어로 읽고 옮긴 독일문학 번역가로서의 전문성도 제대로 인정받지 못한다. 소설가도 시인도 문인도 작가도 아니라는, 그냥 일찍 요절한 젊은 여성 전혜린에 대한 반 백년간의 비판은 이제 그만둬야 될 때가 되었다.

 

절대 안된다.

수필가이자 번역가였으며, 독일문학을 전공한 교수, 우울에 휩싸여 있지만 책 한 권의 수필에 담긴 삶의 철학까지도

다시 돌아봐야 하지 않나?

전혜린을 다시 만나 볼 생각은 없으신가요?

전혜린의 책속에 언급되었던 이 영화도 함께 추천해드리죠.

나치에 저항한 독일 대학생들의 이야기죠.

 

 

네이버영화'소피 숄의 마지막 날들'스틸컷

 

엄청난 혁명가이자 세계사에 일획을 그었다고 칭송하는 것이 아니다.

그 시절,

여성들에게 정당한 인간 대우가 없던 시절에 채택한 한 인간에 대한 평가를 다시 하자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 뿐이다.

전혜린의 수필-기행문에서 한국인으로서의 고통스러운 자의식이나 모멸의 감정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녀가 남성이 아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여성으로서 나에겐 조국이 없다. 조국을 원하지도 않는다. 여성으로서 나의 조국은 전 세계다." 버지니아 울프가 떠오르는 말이.

 

물론 전혜린은 조국보다 세계시민으로서 스스로를 만들어 가고 있었다.

또한 페미니스트라고 주장하진 않았지만 엄연히 페미니스트의 역사속의 한 획을 담당하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건 나 혼자만의 생각일까.

 

 

네이버영화'쇼피 숄의 마지막 날들'스틸컷

 

수필가 전혜린은 뮌헨대 유학시절 일기에서 이렇게 말했다.

뮌헨대학엔 세 개의 광장이 있다. 후버 교수 광장이 앞 광장이고, 솔 남매 광장이 뒤쪽 광장이다. 또 하나는 국민 사회주의의 희생자 광장이다.

세 광장은 히틀러의 나치주의에 대항한 진정한 인간의 자유와 학문의 자유를 기념하기 위해 붙여진 이름들이다.

2차 대전 중 반나치 비밀지하조직 <백장미>란 저항단체가 있었다.

1943217일 뮌헨대 학생이던 한스 숄과 그의 누이 소피 숄 남매는 대담하게도 게쉬타포 교수와 게쉬타포 학생들이 들끓는 이 학교 뜨락에서 백장미의 반나치 유인물을 뿌렸다결국 두 남매는 즉결재판에 회부돼 6일 뒤 222일 처형됐다. 당시 뮌헨대 총장이던 후버 교수도 함께 처형됐다.”

 

 

마크 로테문트 감독, 117분.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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