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기/인물

베트남 축구대표팀 감독 박항서, 인간 박항서

von3000 2018. 11. 28. 17:09
반응형

박항서 베트남 국가대표팀 감독!

축구 선수가 30대에 접어들면 젊은 선수들에게 치여 으레 선수 생활을 마감했다던 1980년 대 즈음.

박항서 감독 역시 서른한 살에 은퇴를 했다. 선택의 기로에서 그가 선택한 건 지도자.

"똑같은 패턴에서 일하는 것 자체가 나와 맞지 않는다."는 생각에서다.

 사진출처,연합

박감독을 되돌아 기억을 더듬어 보면 

30여 년 전 은퇴 후 럭키금성 코치, 1994년 미국 월드컵 대표팀 트레이너,

2002년 한·일 월드컵 대표팀 수석 코치, 상주상무 감독 등을 거쳐 베트남 국가 대표팀을 이끌기까지

그는 은퇴 후 삶을 간단하게 정리하면 이렇다.

그러나 이 속에 숨어 들어 있을 고뇌와 아픔, 사랑과 분노, 고통과 책임 등 수십 가지의 감정들을 다 나열하고 그 감정을 수도 없이 거치면서 여기까지 왔을 것이다.

학교 선생님으로 보다 안정적으로, 소소한 행복을 맛보며 살 수 있었다.

하지만 박 감독은 전쟁 같은 프로 무대 지도자'를 택했다고 했다.

"대학교 때 교사 자격증이 있어서 모 중학교에 체육 선생 겸 축구 감독 제의는 받았었다. “

장래에 대한 고민을 엄청한 건 사실이다.

그 때 다행히 LG 그룹 구태회 고문께서 은퇴 소식을 들으시고는 지도자 생각이 없느냐고 제안해주셨다.

제게는 정말 고마우신 분이시다." 

 

사진출처,AFP,베트남응원 모습

베트남을 이끌고 아시아축구연맹(AFC) 23세 이하 챔피언십 준우승,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 4위라는 눈부신 성과를 거두었다.

원래 학연도, 지연도 변변찮은 박 감독이 지도자로 꽃피울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성실함이다. 일벌레처럼…….

 

축구 지도자로 길을 걷고자 했을 때 첫 번째 스승을 만난다.

김호 감독이다.

김호 감독 눈에든 이유가 바로 박항서의 성실성이다.

끊임없이 선수들을 아끼고 알아가고 관계의 돈독함을 통해 컨디션들을 점검한다. 위르겐 하인츠 게데 베트남축구협회

기술위원장은 성실성으로 일군 박 감독의 경험에 선임 당시 높은 점수를 줬단다.

하이안 사무국장은 박 감독 사단의 스카우팅 노력과 선수 파악을 위한 쉴 새 없는 미팅에 혀를 내둘렀다.

 

또 한분의 스승은 2002년 전 국민을 열광하게 한 거스 히딩크 감독이다.

박항서 감독은 이를 충격이었다고 말한다.

', 지도자는 이렇게 해야 하는구나' 생각했다.

이렇게 밖에는 그 어떠한 수사로 설명할 수 있을까. 지도자가 이렇게 준비하고 연속성을 가지고 해야 한다는 것을

온 몸으로 배웠다.

 

무엇인지 잘 모르겠지만 정말 많이 변했다 생각한다.”

박항서 감독의 한마디다.

,

 

 

2002년 영광 뒤 박 감독도 힘든 시기를 거치기도 했다.

인생이란 게 어디 슬슬 물 흐르듯이 갈 수 있을까. 그리고 막다른 길에서 기회를 잡았다.

상주 상무감독이다.

2015년 말 상주 상무 지휘봉을 놓은 뒤 스스로도 돌파구가 찾을 수 없었다는 그는 1년여를 그냥 보낸다.

그 후 창원시청 축구단을 이끌고 있을 무렵 베트남으로 날아간다.

 

  사진출처,AFP,베트남응원

그리고는 그동안 성실히 쌓아온 경험과 '새로운 축구에 대한 열망'으로 협회를 꾸준히 설득한 것으로 전해졌다.

베트남에서 1년 만에 일궈낸 성과는 현지서도 '기적'이라 부른다.

U-23 대표팀을 이끌고 나선 굵직한 두 대회에서 베트남 역사상 최고 성적을 냈다.

그러면 말 다한 것이다.

베트남 내에서는 아시안컵보다도 우승 열망이 강한 일명 '동남아 월드컵'이 있다.

스즈키컵이다.

이번 아세안축구연맹(AFF) 스즈키컵 2018’에서 10년 만에 우승에 도전하고 있다.

여기서 또 한 번의 박항서 기적이 진행되고 있다.

 

사실 무심코 뒤돌아보면 박항서의 매직이 아니었다.

박항서의 인간에 대한 존중이었다.

박항서의 땀방울이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