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기/인물

혁명가, 로자 룩셈부르크, 그리고 전혜린

von3000 2018. 12. 2. 1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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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살아가는 데 있어 그 무엇을 갈구한다는 것은 정말 행운일 것이다.

이러한 갈구함을 한 번도 경험하지 않고 주어진(누가 주었는지는 모르지만!) 일에 피동적으로만 움직인다면 기계이지, 그게 사람의 삶일까 하는 생각들이 달려오는 요즘이다.

평범한 것.

그 너머의 절대 세계를 동경하고 그것을 향해 한 걸음씩 내딛는다는 것.

그런 열정과 광기! 하지만 그 자체의 답은 없다.

우리 가슴에 불에 덴 것과 같은 강렬한 화인(火印)을 남기고 세상을 떠난 혁명가 로자 룩셈부르크!

출처,세계인물대백과

독일의 11월 혁명 정국 속에서 한때 자신이 몸담았던 독일 사민당이 급격히 우익으로 돌아서면서 정권을 잡자마자 이 왜소한 중년 여인 로자 룩셈부르크를 살해한다. 얼마나 그녀가 무서웠을까?

 

그녀를 살해한 독일사민당 군인들도 11월 혁명을 이끌어 제정을 무너뜨린 세력이었다. 얼핏 그녀와 별반 다를 바 없는 노선을 걸어가는 사람들이었다. 크게 다르지 않을 것처럼 보였던 세력들이 로자 룩셈부르크를 서둘러 체포하고 재판도 없이 무참히 살해한 것이다. 이는 로자 룩셈부르크라는 인물이 가진 타협을 모르는 순수 사회주의 사상과 그녀의 폭발적 행동력,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적은 멀리 있지 않다

 

그녀는 20세기 초, 러시아와 독일의 혁명을 주도하며 새로운 자유와 평등 사회를 꿈꾸던 정열의 혁명가이자 마르크스 이래 가장 뛰어난 두뇌의 소유자로 일컬어지던 탁월한 이론가였다.

로자 룩셈부르크

  출처,마가라테 폰 트로타 감독의 영화'로자 룩셈부르크. 1986

 

러시아 혁명을 완수하고 사회주의를 이 세상에 선포한 레닌도 무서워하는 자! 바로 로자 룩셈부르크이다.

폴란드 태생의 유대인. 스위스 취리히에서 공부하고 위장 결혼을 하고 독일로 향한다. 이 때부터 주로 독일에 거주한다.

그녀는 20대의 나이에 사회개혁이냐, 혁명이냐? ‘(1900)라는 논문에서, 당시 독일사민당의 거물이었던 베른스타인의 수정주의, ’고도로 산업화된 자본주의 사회 내에서 혁명과 같은 물리적인 방법보다는 노동조합 활동이나 의회 진출 등을 통해서 점진적으로 권력을 획득해야 한다.는 베른스타인의 이론을 강력히 비판하였다.

베른스타인이 말하는 점진적인 사회주의 권력 장악은 공상일 뿐이라고 비판하며 전통적인 마르크스주의를 옹호하고 혁명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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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그녀는 직업적 혁명가에 의한 혁명의 주도와 정당조직의 규율화를 강조한 레닌의 주장에도 비판을 가하며, 엘리트 혁명이 아닌 노동자 중심의 혁명을 통해서만 승리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노동자 스스로가 만든 평등하고 자유로우며 민주적인 세계를 꿈꾸었다. 그녀는 그것이 실현 가능하다고 굳게 믿었던 것이다. 그러나 대다수 그녀의 동료들은 상황과 자기논리에 맞추어 변해갔고 결국, 그녀에게 등을 돌리고 그녀의 존재를 부담스러워하게 된다.

변절한 인간들은 자신의 바뀐 행동과 가치를 옹호하기 위해서라도 더 철저히 변함없이 거친 길을 가고 있는 옛 동지들을 무참히 짓밟는다. 독재 권력보다도 더 하다. 이것은 지금 우리나라에서도, 우리 주변에서도 많이 목격되는 장면들이다.

1918년에 감옥에서 집필한 러시아 혁명’(사후 1922년 출판)에서는 한편으로 혁명을 이끌었던 레닌과 트로츠키에게 경의를 표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볼셰비키의 중앙 집권적 독재와 민주주의에 대한 억압, 민족자결주의적인 태도 등을 비판하였으며, 혁명이 관료주의화 되고, 부르주아적 독재로 귀착될 것에 대해 강력히 경고한다.

로자 룩셈부르크 영화

출처,영화의 한장면

이런 소리를 들으면서도 블라디미르 레닌은 언제나 로자를 찾았다.

비밀리에 다른 나라를 가는 길이 있을 때는 항상 로자에게 들렀다고 한다.

꾸중을 들으려고

사실 레닌은 1922년 뇌일혈 발작으로 투병하고 마지막 1년은 실어증(失語症)까지 겹쳐 병상에서 지내다가,

1924년 사망하였다.

레닌 사후 스탈린이 등장하고 로자 룩셈부르크가 우려하던

직업적 혁명가에 의한 혁명의 주도와 정당조직의 규율화를 강조한 엘리트 혁명 중심으로 서서히 스며들던 사회주의는 자멸의 시작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소련의 해체되고 동서 냉전이 종식 된 것이 아니라 로자가 우려하고 걱정하던 내용을 받아들이며 실천해 온 레닌이 죽은 후 후계자(스탈린부터)들이 들어서면서 시작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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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 11일 독일 공산당을 창설한다.

그 후 2차 독일 혁명이 일어났을 때많은 혁명세력과 좌파 사회주의자들이 당시 군부와 결탁한 독일사민당의 우파세력에 의해 살해되는데, 로자 룩셈부르크도 이 때 체포되어 감옥으로 이송 도중 호송병들에 의해 살해되었다.(1919115) 로자 룩셈부르크의 시신은  살해된 후 베를린의 운하에 버려졌고, 4개월이 지난 그해 5월이 되어서야 수면 위로 떠올랐다.

그들이 동료들과 함께 묻힌 프리드리히스펠데 공원묘지에는 그들의 순수한 열정과 이상을 기리는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으며, 매년 1월 많은 사회주의자 및 공산주의자들이 모여서 그를 추모하고 있다.

블라디미르 레닌은 로자 룩셈부르크를 가리켜 로자는 혁명의 독수리였으며, 독수리로 남을 것이다.”라고 했다.

전헤린

출처,한겨레신문사,전헤린

로자를 보면서 어느 조용한 황혼, 길가의 주막에 쓰러져 있는 집시가 있거든 나라고 알아줘!”라고 친구에게 속삭였던 전혜린을 떠올린다.

1960년대, 서른의 젊은 여교수가 당당하게 담배를 물고 서울대 교정을 휘젓고 다니며 불꽃같은 삶과 광기의 전혜린은 31세로 요절하며 이 세상에서의 짧은 생을 휘발시킨다.

로자를 보면서 전혜린이 함께 떠오르는 것을 공통의 지금을 넘어 저 세상을 향하는 것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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