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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전쟁, 민간인 학살 인정하고 진정한 사과를 할 때다.

von3000 2018. 4. 14. 1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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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세계 대전 이후 한반도처럼 둘로 갈라진 나라가 또 있었다. 바로 베트남이다.

베트남은 19C말부터 프랑스의 지배를 받았고 제2차 세계 대전이 터지고 프랑스가 독일에 점령당한 사이에는 일본이 베트남을, 일본은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자 베트남에서 완전히 물러났다. 이때 호찌민이 이끄는 베트남 공산주의자들이 혁명을 일으켰고 일본의 꼭두각시였던 왕조를 무너뜨리고 베트남 민주 공화국을 세웠다. 여기까지는 역사의 자연스러움이다. 슬프지만, 여느 나라처럼...

 

베트남 전쟁

사진출처,sescia의 불로그

그런데 이 때 프랑스가 베트남을 지배할 권리를 주장했다. 결국 1946년 베트남 민주 공화국과 프랑스가 8년간 전쟁이 이어졌다. 이를 인도차이나 전쟁이라 한다. 1954년 베트남에서 스스로 물러났다. 프랑스의 패배다. 이 때 제네바 협정에 따라 북위 17도를 기준으로 베트남은 남과 북으로 나누어 진 것이다.

 남과 북 모든 베트남 사람들이 힘을 모아 외국 세력을 몰아내고 남북을 통일합시다.” 베트남의 정신적 지도자인 호찌민이 베트남을 하나로 모으기 시작했다.

여기에 미국이 나선것이다. 왜 그랬을까? 미국은 많은 군대를 베트남에 보냈다. 미국내에서의 반전운동도 만만치 않았지만, 1965년부터 점점 미국이 숫자를 늘려 1969년에는 54만 명에 이른다. 미국은 다른 나라의 군대까지도 베트남 전쟁에 끌어들였고, 한국을 비롯해 호주와 필리핀의 군대가 파견되게 된 것이다.

 

베트남 전쟁

사진출처,sescia의블로그

 

미국이 계속 전쟁에서 밀리면서 미군은 남베트남 민족 해방 전선을 숨겨 주었다는 핑계로 수많은 주민들을 학살했다. 밀림에 숨어든 게릴라를 찾는다며 고엽제를 뿌렸다. 그러나 역사상 처음으로 미국 정부와 군은 전쟁에서 패배했다. 동양의 작은 나라가 세계 최고의 두강대국을 상대로 전쟁에서 승리한 것이다.

다시 대한민국을 돌아보자1968212일 베트남 꽝남 성 퐁니·퐁넛 마을 주민 74명이 한국군에 의해 학살됐다. 하미 마을에서는 135명이 학살됐다. 올해가 50주기다. 18일 그 당시 현장에서 살아남은 두 사람이 한국에 온단다. 시민평화 법정에서 증언하기 위해서다. 민변 등이 주최하고, 김영란 전 대법관이 주심 판사를 맡는다.

 

베트남 파병된 한국군

사진출처,뉴시스

한국군이 베트남전에 참전한 것은 1964. 한국 정부는 아직 공식적으로 민간인 학살을 인정한 적이 없다. 그러나 민간단체에선 66년과 68년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이 집중해 일어났다.

구수정 한·베평화재단 상임이사는 베트남전의 진실을 알리고 있다. 베트남 언론에 한 줄도 보도가 안 됐어요. 김대중 전 대통령의 유감 발언이나 노무현 전 대통령의 마음의 빚이라든지 이런 내용이 베트남 언론에는 한 줄도 보도가 안 돼서 베트남 분들은 전혀 몰라요. 한국만 시끄러운 거예요. 사과했다고.”(중앙일보 김진국이 만난사람 참조)

긴 한숨이 몰아쳐 온다.

우리도 마찬가지일걸요? 일본 총리가 유감 발언하면, 일본 언론들은 사과했다고 난리가 나는데, 정작 우리는 사과 아니다. 분노하잖아요? 우리는!”

 

지금 우리는 베트남 국민들은 하나도 모르는 사과를 반복하고 있다.

 

빌리브란트

  빌리 브란트 전 서독 총리가 1970년 12월 폴란드 바르샤바의 유대인 게토 추모비 앞에

무릎을 꿇고 나치의 손에 잔혹하게 희생된 이들의 넋을 기리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우리가 흔히 말하는 사과의 모범!

사과의 모범이라고 하면 항상 독일에 빌리 브란트 독일 총리가 현장에 가서 무릎을 꿇고 사과한 역사의 한 장면!

바로 이 장면이 지금까지 독일은 사과했다고 전 세계로부터 인정받고 있는 것이다..

현장에서의 사과가 가장 중요한 이유다.

 

베트남은 말한다. 학살은 시인 안 하면서, 큰 학살이 있었던 빈호아에 92년 일본이 초등학교를 지었다. 한국도 2005년 중학교를 지었다. 일본은 운동장이 있는 2층 건물을 튼튼하게 잘 지어서 지금도 잘 쓰는데, 한국은 담장도 없는 교실 8개를 지어줬는데 유리창이 깨지고, 지붕에 물이 새고, 결국 다시 건물을 지어 이전했단다.

또한 빈호아 마을에는 80년대 영국 작가가 들어와 한국군 학살 위령비를 세웠다. 나중에 베트남 사람들이 그 옆에 증오비도 세워졌다. 이후 독일 NGO가 한국군 민간인 학살 피해자들의 의족·의수 작업을 하고 있다.

 

한국증오비

  사진출처,한-베평화재단, 한국군증오비

 

베트남전에 참전했던 한국의 병사들도 피해자다. 누가 시켰는지도 모르고 남의 나라 전쟁에 참여해서 사실 월급도 못받고, 그 정글속에서 전우가 죽어가는 걸 본다는 건 끔찍한 일이다. 미군이 뿌린 고엽제 후유증으로 아직도 고생하고 있다. 명령을 받아서 움직인 것 밖에 없는데 인정해주지도 않고 눈치보는 세상이다. 정말 안타까운 현실이다.

물론 베트남 정부도 당시의 생존자들이 여전히 있고, 남북 베트남의 마음의 화합이 겨우 아물어 가고 있는데 사죄의 순간이 너무 빨라도 베트남 국민들에 가슴에 다가오지 않을 수도 있다 걸 알고 있다. 그래서 조금은 주저할 수도 있지만... 그건 베트남 정부의 입장인 것이고 우리는 달라야 하지 않을까?199812월 베트남을 방문한 김대중 대통령은 양국이 불행을 겪었던 시기가 있었던 것을 유감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2004년 호찌민 묘소에 헌화한 뒤 우리 국민들은 마음의 빚이 있다고 말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311일 베트남 호찌민시 응우엔후 거리에서 열린 호찌민-경주세계문화엑스포2017’ 개막식 영상 축전에서 한국은 베트남에 마음의 빚을 지고 있다고 말했다. 문 대통령은 또 323일 쩐 다이 꽝 국가주석과 만찬을 하며 우리 마음에 남아 있는 양국 간의 불행한 역사에 유감의 뜻을 표한다고 말했다.

 

사진출처,연합

만약에 일본 총리가 마음의 빚을 이야기하면서 유감스럽다 하면 대한민국은 이를 사과로 받아들일 것인가?

유감인 것이다, 진심어린 사죄가 아니다..

마음에 빚이 있다는 건 내 감정을 표현한 것일 뿐이다. 진심어린 사죄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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