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 사람을 천재라 부른다. 대한민국이 낳은...
모든 천재들처럼 천재의 이면에는 몰입이라는 광기가 도사린다. 이 상(李 箱)에게도 마찬가지다. 어찌보면, 미치광이가 되어버린 니체처럼, 기나긴 감옥속에서 잉태한 천재성을 강렬하게 펼친 도스도예프스키처럼, 또는 스탕달처럼, 이 나라의 이 상(李 箱)은 광기마저 아름다운 모든 것의 천재이다. 이 상(李 箱)! 27살의 나이의 요절이 정말 안타까움으로 다가온다. 또 다시 다른 관점에서 이 상(李 箱)을 좀 더 포스팅 하고 싶다.
오감도(烏瞰圖)----제1호 조선중앙일보 1934.7.24.
이 상(李 箱)
13인의아해(兒孩)가도로로질주하오.
(길은막다른골목이적당하오.)
제1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2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3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4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5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6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7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8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9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10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11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12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13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13인의아해는무서운아해와무서워하는아해와그렇게뿐이모였소.
(다른사정은없는것이차라리나았소.)
그중에1인의아해가무서운아해라도좋소.
그중에2인의아해가무서운아해라도좋소.
그중에2인의아해가무서워하는아해라도좋소.
그중에1인의아해가무서워하는아해라도좋소.
(길은뚫린골목이라도적당하오)
13인의아해가도로로질주하지아니하여도좋소
오감도(烏瞰圖). 까마귀가 바라보는 시선의 그림이라. 이 상(李 箱)의 시(詩)를 보면 깜짝 놀란다.
도대체 무얼 말하려 하는지 무엇을 노래하고 싶은지 알 길이 없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의 암호 해독보다도 더 어려운...
그 의미를 알 수 없는 숫자의 배열과 반복되는 텍스트들과 집중해서 읽어도 모르고 가느다랗게 눈을 뜨고 의미심장하게 읽어도 모르겠다. 독자 입장에서 보면 한마디로 아주 불친절 하다.
오감도(烏瞰圖)----제2호 조선중앙일보 1934.7.25
나의아버지가나의곁에서조을적에나는나의아버지가되고또나는나의아버지의아버지가되고그런데도나의아버지는나의아버지대로나의아버지인데어쩌자고나는자꾸나의아버지의아버지의아버지의...아버지가되느냐나는왜나의아버지를껑충뛰어넘어야하는지나는왜드디어나와나의아버지와나의아버지의아버지와나의아버지의아버지의아버지노릇을한꺼번에하면서살아야하는것이냐
그 중에서도 가장 덜 난해한 시(詩)중에 하나가 오감도(烏瞰圖)이다.
의미를 알 수 없는 숫자의 배열로만 가득 차 있는 시(詩)도 있으니까. 이해가 안된다.
하지만 숫자가 하나, 둘 거듭될수록 무언가 느낌이 있다. 소름이 끼친다. 설명하지 못하겠다.
이 시(詩)를 읽은 사람들 중 같은 느낌을 말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이 상(李 箱)은 그걸 노렸던가? 조금은 심술궂다.
하지만 이제까지 누구도 이상이 무엇을 말하려는지 완벽하게 해독하지는 못한 것 같다.
속 시원하게 말해주는 이가 없다는 말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 상(李 箱)에 대해 박사논문을 쓰고, 두꺼운 책도 쓰지만 읽어보면 더 어렵게 만들어 놓았다.
오감도(烏瞰圖) --- 제3호 조선중앙일보 1934.7.25
싸움하는사람은즉싸움하지아니하던사람이고또싸움하는사람은싸움하지아니하는사람이었기도하니까싸움하는사람이싸움하는구경을하고싶거든싸움하지아니하던아니하던사람이싸움하는것을구경하든지싸움하지아니하는사람이싸움하는구경을하든지싸움하지아니하던사람이나싸움하지아니하는사람이싸움하지아니하는것을구경하든지하였으면그만이다.
화실에서의 이 상(李 箱),1929년 추정
평생 공부한 학자들이 왜 속 시원하게 해독을 못할까?
그것은 천재와 공부만 열심히 한 학자의 시선이 다름인 것 같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천재들은 각기 전문분야가 하나씩 있다. 간혹 두 개를 물고 태어난 천재들도 있지만...
이 상(李 箱)은 텍스트, 이미지, 디자인, 수의 배열, 운율 등 모든 면에서 천재성을 드러낸다.
그리하여 이것을 막 섞어서 며칠동안 까먹고 뒹굴뒹굴 놀다가 갑자기 떠오른 생각을 번개같이 집어넣어 만들어 놓는다.
이것이 이 상(李 箱)의 시(詩)이다. 이 천재가 이 상(李 箱)이다.
오감도(烏瞰圖) --- 제4호 조선중앙일보 1934.7.28
이런데 시(詩)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아니. 다 느낄 수도 없다.
이 상(李 箱)의 시(詩)는 논리적으로 쓰여 있는 것 같지만, 사실 논리적으로 쓴 것이 아니며, 논리적으로 이해하려고 노력해서도 안되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마음 가는 대로, 감정이 포효하는 대로 시속으로 침잠해야 할 것이다.
이 상(李 箱)의 시(詩)는
그러니 그냥 처음 대충 읽은 다음
어린 시절의 나로 돌아가 가슴에 불어오는 산들바람처럼 그냥 불쑥 만나고 오면 된다. 이것이 천재들의 작품이라는 것을 대하는 장삼이사들이 자세이지 않을까 싶다.
시(詩)의 제목처럼 까마귀 눈으로 보는 그림을 까마귀의 가슴으로 느끼면 되지 않을까?
그런데 난 까마귀도 아닌데...ㅎㅎ
까마귀가 되어야지...까마귀가 되자...까마귀가 되자...
이 상(李 箱)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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