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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의 재즈 디바 니나 서먼의 슬픈 이야기, 인권운동가

von3000 2018. 11. 7. 1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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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개봉한 전설의 재즈가수, 니나 서먼의 이야기를 영화화한 니나(NINA)’를 보게 되었다. 신시아 모트 감독의 2016년작, 다큐멘터리 형식의 영화를 보고 니나 서먼의 음악을 찾아보게 되었다.

 

니나 서먼

사진출처,네이버

 

1960년대 미국은 무질서와 혼란의 시기였다. 베트남 전쟁에 대한 반전운동과 케네디대통령의 암살, 흑인 인권운동의 선구자였던 마틴 루터 킹 목사와 말콤X의 암살등이 이어졌다. 이로 인해 흑백갈등이 수면위로 등장하며 시위와 저항의 물결이 끊이질 않았다.

니나 서먼! 그 중심에 있던 니나!

킹목사의 암살에 땅을 치며 통곡하였고, 특히 말콤X와는 이웃에 살며 친하게 지내왔던 사이라 더욱 그의 죽음에 망연자실 할 수밖에 없었던 니나! 오로지 음악으로 저항할 수밖에....

이러한 사회에 늘 함께 불타오르는 것은 음악이다. 그 역사의 현장에 전설적인 재즈의 디바 니나 시몬(1933~2003)이 있었다. 그의 음악은 언제나 직설적이었으며, 분노였으며, 오열이었다. 미국 저항음악의 시작이 된다.

 

영화 니나 포스터

  사진출처,네이버영화 포스터

 

니나 서먼은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에서 태어난 3살 때부터 피아노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영화는 12살 때 그녀의 피아노 연주회에 가장 앞자리에 앉았던 부모님이 백인들에 의해 뒤로 쫒겨나는 것을 보고 연주를 거부했다. 결국 부모님은 제자리로 돌아왔고 연주회를 시작했던 그녀의 실화로부터 시작된다.

줄리어드음대에 진학해 클래식 음악을 배웠다. 넉넉지 않은 가정이지만 부모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클래식 피아니스트의 꿈을 향해 가던 니나에게 시련이 온다. 이는 필라델피아에 있는 커티스음악원에 높은 성적에도 불구하고 흑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낙방한 것이다. 이때부터 니나 시몬이라는 예명으로 클럽에서 재즈가수로 첫발을 내딛었다.

 

1958년 니나 시몬은 데뷔앨범 리틀 걸 블루(Little Girl Blue)’를 발표했다. 데뷔 때부터 돈을 벌 목적으로 대중적인 음악을 추구했으나, 1960년대 들어서 인종차별에 저항하는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1964년에 수록된 미시시피 갓댐(Mississippi Goddam)‘은 미국 남부지역에서 백인 우월주의자들에 의한 흑인 살해사건이 잇달아 터져나오고 있을 때, 이 뉴스를 접한 니나는 1시간만에 작사, 작곡을 끝냈다고 한다노래에 ‘Goddem’이라는 저주의 단어를 사용한 만큼 사회적 논란은 증폭되었고, 금지곡이 되었다.

천천히 하자는 것은 더 많은 비극을 불러올뿐이다. 왜 못보는가? 왜 느끼지 못하는가? 정말 모르겠어. 같이 사는 것이 아니라 똑같이 대우해 달라는 거야'

이러한 격동기에서 음악을 했던 니나의 삶도 평탄치는 않다. 알코올 중독, 당뇨병, 유방암까지 그녀의 삶 또한 미국 사회를 닮아있다.

1970년 니나 시몬은 미국 사회에 환멸을 느낀 끝에 미국을 떠난다. 1993년 프랑스에 정착했고, 유럽과 미국을 오가며 공연했지만 점점 쇠락해갔다. 그녀의 몸도...

 

Ain't Got No, I Got Life - Nina Simone 

 

니나 시몬은 재즈를 비롯해 블루스·소울·가스펠·클래식 등을 포괄한 다채로운 스타일의 음악을 선보였으며, 인종차별을 반대하는 노래들로 미국에서 흑인 인권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남자인지, 여자인지 구분이 안 될 정도의 굵은 중저음의 보컬로 대중의 큰 사랑을 받았다.

시몬은 2001년 카네기홀에서 공연했으며 2002년 7월 폴란드에서 생애 마지막 공연을 펼쳤다.

미국 출신의 전설적인 흑인여성 재즈가수 니나 시몬이 2003년 프랑스 마르세유 인근 카리르루에의 자택에서 타계했다. 향년 70. 힘든 과정을 아주 오랫동안 지켜 봐왔던 시몬의 매니저 클리프튼 헨더슨은 이날 오래전부터 건강이 안 좋았으며 자연사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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