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멕시코의 화가이자 혁명가, 프리다 칼로,Frida Kahlo de Rivera

von3000 2018. 11. 5.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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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우연한 기회에 프리다 칼로를 만났다.   온 몸에 철심이 박힌 한 여자의 자화상! 칼로였다. 이제야 알게 되다니........분하다!

프리다 칼로(Frida Kahlo de Rivera, 1907-1954)20세기 멕시코 미술계를 대표하며 피카소, 간딘스키를 잇는 여류 초현실주의 화가이자, 혁명가이다. 벽화주의 운동의 세계적 거장인 멕시코의 대표적 화가 디에고 리베라의 아내이기도 하다. 그녀는 뛰어난 외모와 재기를 타고 났으나, 여섯 살 때 소아마비와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평생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겪은 프리다 칼로는 프리다 칼로는 초현실주의 계열화가 가운데 자화상에 가장 집착했다.

그녀는 멕시코 최고의 교육기관이던 에스쿠엘라 국립 예비학교에 진학했다. 그 곳에서 벽화를 그리러 온 멕시코의 혁명가이자 화가인 디에고 리베라를 처음 만난다. 당시 리베라는 멕시코와 혁명을 대표하는 미술가라는 명성과 함께 분방한 여성편력과 돌발적이고 기괴한 행동으로 명성을 드날리고 있었다. 그림에 관심은 있었지만 화가가 될 생각은 없었던 칼로에게 리베라는 자신의 인생과는 무관한 그저 괴팍한 예술가였을 뿐이었다.

프리다 칼로

잠깐동안의 연인이었던 사진작가 니콜라 머레이가 찍은 프리다 칼로


칼로가 18살이던 19259월에 일어난 교통사고가 아니었다면 그녀는 멕시코의 진보적인 여성 의사로 인생을 살아갔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운명은 언제나 자신의 꿈만을 허락하지는 않는다. 마치 시험하듯이. 하굣길에서 버스와 전차가 부딪히면서 칼로는 치명상을 입었다. 그녀의 옆구리를 뚫고 들어간 강철봉이 척추와 골반을 관통해 허벅지로 빠져 나왔고 소아마비로 불편했던 오른발은 짓이겨졌다.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기적이었다. 의사들은 아무도 그녀가 다시 걸을 수 있다고 장담하지 못했다. 칼로는 꼬박 9개월을 전신에 깁스를 한 채 침대에 누워 있어야만 했다. 그녀는 후에 자신은 다친 것이 아니라 부서졌다고 표현했다. 침대위에서 그 어떤 것도 꿈꿀 수 없는 날들의 연속이었다.

 

예전 잠깐 동안 친하게 지냈던 형이 공장에서 일하다 왼 속목을 절단당하는 큰 사고를 겪었다. 몇 개월을 병원 신세를 지던 형이 병원 옥상에서 모든 것을 내려놓으려 할 때, 저 멀리서 아들이 먹을 점심을 머리에 이고 걸어오는 엄마를 보게 되었단다. 눈물을 흘리며 그렇게 병실로 내려 왔단다.

 

 

프리다 칼로 부서진 기둥

온 몸에 철심이 박혀 있는 칼로의 자화상 <부서진 기둥> 1944, 캔버스에 유채, 40X30.7cm

 

칼로는 옥상으로 올라갈 힘도 없었다. 그 곳에서 할 수 있는 건 자유로웠던 두 손으로 그림을 그리는 것뿐이었다. 누워서 운신할 수 없었던 칼로는 거울에 비친 자신을 관찰하고 또 관찰하며 스스로의 모습을 그려가기 시작했다. 이것이 그녀가 평생을 두고 자화상을 그리기 시작한 계기였다.

칼로는 자화상에 대해 나는 너무나 자주 혼자이기에 또 내가 가장 잘 아는 주제이기에 나를 그린다.”고 말했다.

우연한 기회에 칼로의 그림을 본 리베라는 프리다의 작품에서 예기치 않은 표현의 에너지와 인물 특성에 대한 명쾌한 묘사, 진정한 엄정함을 보았다.잔인하지만 감각적인 통찰력에 의해 더욱 빛나는 생생한 관능미가 전해진다. 나에게 이 소녀는 분명 진정한 예술가였다고 평했다. 리베라는 화가가 되겠다는 칼로의 결심을 굳혀주었다 그리고 둘 사이에 사랑이 싹텄다. 그리고 21살의 나이차를 딛고 스물두 살에 결혼한다.

 

프리다 칼로 부상당한 사슴

부상당한 사슴(나는 가련한 작은 사슴)1946, 섬유판에 유채, 22.4X30cm

 

결혼 후 행복한 삶을 기대했지만 여성편력을 가지고 있던 리베라는 결혼 후에도 외도를 멈추지 않았다. 남편 리베라로 인해 칼로는 질투와 분노를 넘어선 고독과 상실감을 평생 안고 살아가야만 했다. 리베라의 수많은 여성편력을 인내했던 칼로였지만 그녀가 도저히 참을 수 없었던 리베라의 외도는 여동생 크리스티나와의 관계였다. 남편과 여동생으로부터 동시에 배신당한 칼로는 리베라의 성실한 아내 역할을 그만둬 버렸다.(법적인 이혼 절차는 없었음) 

고통없이 탄생하는 창작은 없다 했는가. 칼로에게 가장 잘 적용되는 말일 것이다. 그 후 칼로는 여행을 다니기도 하고 그림을 그리며 지낸다. 그때 또 한 번의 가슴을 끓는 남자를 만난다. 바로 스탈린에 의해 멕시코로 온 트로츠키였다. 칼로는 끝없이 혁명의 길을 걸어가는 트로츠키에게 매료되었고 트로츠키 또한 열정적이고 자신에게 경외의 감정까지 갖고 있는 이 여성을 마음에 간직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도 모른다. 트로츠키와 칼로만이 알 뿐,

트로츠키와 만난 칼로

 

1년간의 만남 뒤 따로 헤어진다. 아마 트로츠키의 이성적인 판단이었을 것이다. 그 뒤 스탈린이 보낸 자객에게 트로츠키는 살해되고 만다. 그 후에도 멕시코 공산당 활동도 열심히 했던 칼로를 가로막은 것은 척추의 고통이었다. 1940년대 말 오른쪽 다리를 절단하였으나 수술의 실패로 침대에서의 생활이 더욱 길게 된다.

19547월 칼로는 당신을 빨리 떠날 것 같다면서 한 달 여 남은 결혼 25주년 기념 은혼식 선물을 리베라에게 먼저 주었다. 그리고 그날 새벽, 칼로는 폐렴증세의 악화로 고통과 고독 속에서 보낸 47년의 슬픈 생을 마쳤다.

일기 마지막에는 이 외출이 행복하기를 그리고 다시 돌아오지 않기를이라고 쓰여 있었다고 한다. 이 글로 일부 사람들은 그녀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 지도 모른다고 추측하기도 한다. 칼로가 죽고 1년 후 리베라는 그녀가 태어나고 죽을 때까지 살았던 코요아칸의 푸른 집을 나라에 기증했다. 그녀의 집은 이제 칼로를 기리는 미술관이 되어있다.

 

디에고 리베라

나의 평생소원은 단 세 가지, 디에고와 함께 사는 것, 그림을 계속 그리는 것, 혁명가가 되는 것이다.”-프리다 칼로-

 

1954년에 죽은 프리다 칼로는 1970년대 페미니즘 운동이 일어나면서 다시 한 번 세계인들에게 재발견되었다. 그녀의 그림이 표현하는 솔직 담백한 여성성과 섹슈얼리티를 후세의 페미니스트들이 높이 평가한 것이다. 양성애자이며 공산주의자로 격정적인 삶을 살았던 프리다 칼로는 훗날 페미니즘 미술의 대가로 평가받았으며, 1984년 멕시코 정부는 그녀의 작품을 국보로 분류하였다

나의 육체는 나를 놓아버릴 것이다
제물이 되는 것은 나 자신이다
새벽은 언제나 너무 멀리 있다

- 프리다 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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