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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상에서 가장 오래 남아있을 나라, 쿠바

von3000 2018. 11. 3.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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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바의 혁명!

아바나 거리에서 항상 볼 수 있는 길거리 발레의 모습들. 그 삶속에 깊숙이 들어가 있는 마초적이고 낭만적인 흥의 모습들, 이것을 우리는 '쿠바'라 부른다.

콜럼부스 이후 신항로 개척에 서구의 나라들이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이 때 쿠바는 스페인의 식민지가 된다. 미국과 스페인의 전쟁 이후 1902년 독립하였지만, 그렇지만 미국 자본에 예속된 사탕수수 단일작물재배 경제가 형성되어 실질적으로는 미국의 지배하에 있었다.(이건 우리나라도 비슷한 상황이지.) 토지가 미국 자본과 쿠바인 대지주들에게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에 일반 국민들은 궁핍한 생활을 벗어날 수 없었다. 게다가 독재정권의 부패도 심화되어 여러 차례의 민중봉기가 일어났지만 미국의 비호 하에 진압되었다.

민중봉기 중에 피델 카스트로는 피노스 섬에 있는 프레시디오 모델로 감옥에서 15년 징역을 선고 받았으며, 그의 동생 라울 카스트로는 13년형을 선고 받았다.

 

피델 카스트로

 

1955년 광범위한 정치 탄압 속에서 바티스타 정권은 몽카다 병영을 습격한 쿠바의 모든 정치범을 석방했다. 피델의 예수회 선생들과 그리고 아마도 젊은 시절의 지인들도 바티스타 정권을 설득하여 카스트로 형제를 석방자에 포함하는 데 일조했다.

카스트로 형제는 정권을 뒤엎기 위해 혁명을 준비하고자 멕시코로 가는 망명자들과 합류하였으며, 스페인 내전 당시 공화국군 지도자였던 알베르토 바요의 훈련을 받았다. 이때 피델은 에르네스토 체 게바라를 만나 군대를 규합했다.

195611월 피델이 이끄는 망명자들은 요트 그란마 호라는 배를 타고 쿠바로 간다. 당초 상륙과 동시에 726일단의 야노 사람들과 공조하여 도시에서 반란과 총파업을 일으킬 계획이었다. 신속한 공격으로 정권을 무너뜨릴 수 있을 것이었다.

체게바라

사진출처,위키백과

1956122일 그란마 호를 타고 온 피델 카스트로가 이끄는 82명의 전사들은 무장 저항 운동 단체를 설립할 목적으로 쿠바에 도착했다. 연습과는 달리 계획보다 이틀 늦은 도착이었는데, 배에 너무 많은 사람이 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배에서 내려 쿠바 남동부의 시에라 마에스트라(Sierra Maestra) 산맥으로 향했다. 이동한 지 3일 만에 이들은 바티스타 군대의 공격을 받아 대부분의 일행은 그때 죽었지만 몇몇은 산으로 도망쳤다. 정확한 생존자 수는 확실하지 않지만, 이때 공격으로 시에라 마에스트라 산맥으로 도망갈 수 있었던 자는 원래 왔던 82명 중 22명만 살아남았다. 이중 10명이 붙잡혔고 결국 나머지 12명의 살아남은 자 중에는 피델 카스트로, 체 게바라, 라울 카스트로, 카밀로 시엔푸에고스가 있었다.

사실 혁명의 모든 실행에 핵심적인 인물들이 이들 4명이었다. 그러나 이중에도 처음부터 하나씩 준비과정, 계획, 실행과 혁명후의 모든 것들을 총괄하고 준비했던 이는 카스트로 형제였다.

체게바라 역시 훌륭한 혁명가이지만 어쩌면 자본주의가 만들어 낸 인물이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체게바라의 자녀들은 아버지가 자본주의 나라에서 자본으로 농락당하고 있는 점을 강력히 반대하고 있다. (예를 들면, 체게바라의 얼굴이 새겨진 옷을 만든다는 등)

이들은 혼자 혹은 몇몇 사람씩 뿔뿔이 흩어져 서로를 찾아 산맥을 헤맸다. 결국 이들은 그들을 불쌍하게 여긴 여러 농부의 도움으로 다시 모여 게릴라 군대의 핵심부를 이루었다. 아벨 산타마리아의 누이인 하이데 산타마리아, 그리고 셀리아 산체스는 산에서 피델 카스트로를 도운 여성 혁명가였다.

혁명이 시작되었다. 훈련도 받지 않은 바티스타 군대(신병)는 4~5만 명이었으나 서서히 패배할 수밖에 없었다. 일부 포로로 잡힌 바티스타 군대는 게릴라에 합류하기도 했다.

 

쿠바 여성 혁명가

마에스트라 게릴라 시절의 셀리아 산체스, 피델, 아이데 산타마리아(Haydee Santamaria). [사진제공-임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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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티스타의 하수인으로 의심받는 자들과 경찰, 병사들이 살인, 고문 같은 인권 유린과 전쟁 범죄로 인민 재판정에 섰다.
 
정치범죄 혁명 재판소에서 대부분의 죄수들은 총살되었고, 나머지는 장기 징역을 선고 받았다. 마이애미 쿠바 반체제 인
 
사들의 주장에 따르면, 혁명 재판의 악명 높은 사례가 하나 있는데, 산티아고에서 생포된 바티스타 정권의 병사 포로 70
 
명을 라울 카스트로의 명령으로 모두 처형되었다고 하나 진위는 확인되지 않았다. 거의 모든 이들은 추방명령을 받은 것
 
으로 전해진다. 아바나에서 체 게바라는 라 카바냐 요새의 최고 검사로 임명되었다. 이것은 피델 카스트로가 혁명을
 
꾀할 수 있는 바티스타에 충성하는 세력을 숙청하기 위한 시도의 일환이었다. 처벌 없이 경찰이나 군대에서 쫓겨나서
 
숨을 부지한 자들도 있었으며, 구 정권의 몇몇 고위급 인사들은 해외로 추방되었다.

 

1961년 피그스 만 침공 이후 새 쿠바 정부는 로마 가톨릭교회 등 종교 단체의 모든 재산을 국유화했다. 정부는 공식적으로 무신론을 표방하며 주교를 비롯한 수백 명의 성직자들을 나라에서 쫓아냈다. 파리아는 쿠바 정부의 무신론 입장으로 사립학교는 금지되고 점차 사회주의 국가는 아이들에게 더 많은 책임을 지게 되었다고 썼다. 벽촌에까지 학교가 세워져 모든 인민이 9학년까지 양질의 무상교육 서비스를 보장받게 되었다. 의료 부문 역시 국유화되어 학교와 마찬가지로 벽촌에까지 의료 시설이 들어서게 되었으며, 모든 인민이 양질의 의료 서비스를 무상으로 제공받게 되었다.

 

혁명 한 번으로 라틴 아메리카의 모든 미국 속국들을 위험에 빠뜨렸다.

우리는 이들 나라에게 스스로 혁명을 일으키라고 말하고 있다. ----196210월 체 게바라

 

19592월 피델 카스트로는 쿠바의 총리가 되었다. 그는 즉시 국가 경제의 개혁에 착수하여, 임대와 전기 요금을 내리고 집권 첫 해인 19595, 토지개혁법으로 거의 보상 없이 사유 토지 및 재산을 몰수하였고, 400 헥타르 이상의 토지와 공공시설을 유상 몰수하여 국유화하였으며, 민영 부문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는 한편, 도박 산업을 금지시켰다. 또한 정부는 쿠바에서 많은 미국 시민권자들을 축출하였다.

 

사진출처,구글이미지

쿠바 변호사 마리오 라소는 크기에 관계없이 농장들을 정부가 점유했다고 썼다. 쿠바의 중상류층이 소유하던 토지, 기업, 회사도, 심지어는 피델 카스트로 가족이 소유한 농장도 국유화되었다. 이러한 조치들은 피델 카스트로 정부에 의하여 시에라 마에스트라 선언에서 기초한 프로그램이었다. 쿠바의 중산층은 카스트로가 정권을 잡자마자 대부분 쿠바를 탈출하였다. 이들 망명자의 대부분은 바로 물 건너 미국의 마이애미에 정착하여 격렬한 반 카스트로 운동을 벌이며 미국의 대외 정책에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초기에는 토지개혁 등 민주주의혁명의 성격을 띠었으나, 1960년 후반 이후부터는 사회주의혁명으로 이행하기 시작하였다.

미국 소유의 원유, 전화, 전기 회사와 설탕 공장의 국유화에 따라 미국의 이익이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으면서 미국과의 관계도 악화되었다. 대신에 미국은 쿠바의 설탕 수입을 줄였고 소련은 쿠바의 설탕 잉여분을 사들였으며 무역과 기술 대표단을 파견하였다. 1960년 말까지 혁명 정부는 총 250억 미국 달러에 달하는 사유 재산을 국유화하였다. 이중 미국인의 재산은 불과 1억 미국 달러를 상회했을 뿐이다. 또한 196086일에 미국과 다른 외국 소유의 재산도 모두 국유화되었다. 이에 미국은 미국 내 쿠바인의 자산을 동결하고 쿠바에 대한 통상 제한을 강화하는 것으로 대응해서 지금까지 많이 완화되었지만 지속되고 있다.(글참조,위키백과,라틴아메리카 혁명의 역사)

 

쿠바 거리의 발레 댄서

사진출처, Omar Z. Robles,쿠바거리의 발레댄서

쿠바!

알려지지 않은 나라에서 이제는 배낭여행자들의 코스로도 많이 찾는다. 쿠바여행을 준비하시는 분들은 쿠바 혁명의 역사를 쫒아 가시기를 빈다.

미국의 수십 년간의 경제 봉쇄로 자급자족의 길로 들어설 수밖에 없었던 쿠바는 4차 산업 혁명 등 모든 자본주의의 악폐로부터 벗어나 있다. 이 자급자족의 능력으로 하여 지구가 피폐해지고 모든 산업이 붕괴되어 수많은 국가들이 지도상에서 사라지고 멸망해도 가장 오래도록 남아 있을 나라는 쿠바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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