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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와 바그너

von3000 2018. 3. 19. 1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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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는 9세 때 피아노 연주를 시작했고,

매우 어린 나이에 벌써 쇼팽과 슈만의 영향을 받은 환상곡과 마주르카 몇 곡을 작곡했다

고등학생 때는 이미 음악에 대한 앞으로의 계획을 세워 놓았다. 레퀴엠과 미사곡, 성탄 오라토리오를 습작했고,

또한 당시로선 참신했던 교향곡의 초안을 쓰기도 했다.

14세에는 매우 복잡한 구성의 피아노곡 <알레그로>를 작곡했고, 15곡에 달하는 가곡도 작곡하였다.

 

사진출처,생생블로그

 

이 당시 니체와 바그너 사이의 이야기. 니체가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자,

가만히 듣고 있던 바그너는 "썩 나쁘지 않은 곡이군. 누가 작곡했나?"라고 물었다.

그러자 니체는 "이거 브람스씨가 작곡한 신곡인데요?"라고 말한 것.

당시 요하네스 브람스는 바그너와 대단히 사이가 나쁜 라이벌 관계였다.

당연히 바그너는 대놓고 불쾌감을 나타냈다고ㅋㅋㅋ

 

바그너는 1868년 프리드리히 니체와 처음으로 라이프치히에서 만난다.

한 눈에 뿅가지는 않았겠지만, 음악에 대한 시선, 삶의 가치 같은 고급스러운 대화에서 서로 끌렸으리라.

곧 막역한 친구가 되었다. 절친한 사이가 되고 후에 바그너의 사상은 니체에게 주요한 영향을 주었고,

 그때 니체의 나이는 서른 한 살이었다. 니체의 첫 책인 비극의 탄생’(1872)은 바그너에게 헌정하기도 했었다.

 

뭉크가 그린 니체의 초상

 

 

바그너의 경우’(1888)니체 대 바그너’(1889)에서, 그는 바그너를 퇴폐하고 타락한 것으로 비난했고,

심지어 그 자신의 이른 시절의 미숙한 시야에 대해서도 스스로 자기 비판도 했다.

영향력 있는 저작물인 비극의 탄생의 저자인 프리드리히 니체는 처음에 바그너를 숭배했는데,

그의 음악에서 유럽 정신이 다시 젊어지는 가능성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니체는 파르지팔이후에 바그너와 결별했다.

그는 파르지팔를 기독교 신앙심에 영합하는 표현으로 보았기 때문 이었다.

 

가령 그의 평화주의와 반유대주의와 같은 것에 환상이 깨지면서 결국 멀어졌다.

이후 니체는 바그너의 음악에 대해 '데카당스(퇴폐주의) 예술가'라고 비난을 가했고

"음악을 지중해적인 것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세계 국가에서 신부의 입장 시에 연주되는 가장 대중적인 결혼 행진곡 중 하나.

(흔히 여기 신부가 온다’(Here Comes the Bride)라고 알려져 있다),

그 가락은 로엔그린의 "혼례 합창곡"에서 따온다.

또한 아이러니 하게도 유대인들이 나치에 의해서 독가스실로 들어가면서....

죽어가면서...마지막으로 듣는 음악도 바그너의 탄호이저순례자의 합창이란 곡이다.

 

사진출처,역사사진여행블로그

 

독일의 철학자인 니체가 철학과는 연관이 없을 것 같았던

그 시대의 음악에 관해 평가한 글이었는데,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그 주 대상은 바그너였다.

니체가 음악과 무슨 상관이 있을까 하는 궁금증으로 자료를 찾아본 결과 재미있는 사실을 알아냈다.

 니체는 음악(예술)이 그 시대의 철학, 시대상을 반영한다고 생각했다.

 

  바그너의 경우의 내용 요약을 볼 수 있는데, '

그럼 니체는 바그너를 좋게 평가했네?' 라고 자칫 오해할 수가 있다.

하지만 이 구원은 좋은 의미의 구원이 아니라, 기독교적인 구원을 의미한다.

반기독교적(?)인 니체가 구원적이라고 했다면 그것은 제대로 된 악평인 것이다.

(이글을 쓰는 나는 니체가 기독교에 대한 불신을 주장했던 것이 아니라,

유대인 출신의 프랑스 시인 파울첼란이 말하듯 잘라라! 기도하는 너의 손을!’,

아무것도 실천하지 않고 믿으면 천국을 간다는)

중세기의 교회들이 남겨놓은 유산에 대한 정면승부를 건 것이다

교회는 뒷담만 깠지, 사실 정면승부를 피했다.

 

사진출처,라라복래블로그

 

비제의 걸작 '카르멘'을 어제 스무번이나 들었다 면서 시작하는 이 글은

카르멘과 바그너의 작품들의 비교를 통해 바그너를 비판한다.

카르멘은 사랑하는 여인을 믿고 기다리지만 배신당하고 결국 그 여자를 살해한다는 내용이고,

바그너는 그 반대, 인생 밑바닥의 사람들도 사랑을 통해 행복해진다는 구원적인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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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는 바그너는 구원에 대해 깊이 생각한 인물이고,

그의 오페라는 구원의 오페라다라고 평했다"

 니체는 '신은 죽었다'라는 그의 명언으로 잘 알 수 있듯이 반 기독교적이고

쇼펜하우어의 영향으로 염세적인 성향이 강한 철학자이다.

의외로 한국에도 니체주의자들이 많더라.

 

바그너는 쇼팽과 슈만 이후의 후기 낭만주의 음악가로서 오페라 작곡가로 유명하며

가장 유명한 '트리스탄과 이졸데'등의 작곡가이다.

음악 그자체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브람스에 맞서, 리스트와 함께

음악을 어떤 표현의 수단으로 생각하는,

낭만주의성이 짙은 음악가이고, 조성의 파괴로 유명하다.

 

사진출처,IRMan블로그

 

 

니체는 그들이 믿는 신이라는 존재는 참고 믿으면 구원해주는 다정한 존재가 아니라,

자신을 믿지 않으면 지옥으로 보내버리는 이기적인 존재라는 것을

배신한 여자를 죽여 버리는 카르멘을 통해 비꼬고 싶었던 것 같다.

어쩌면 결과적으로 니체와 바그너는

신을 바라보는 시선의 차이를 넘어서지 못했나 싶다.

 

바그너는 오페스트라다.

바그너 음악의 중심은 오케스트라이다.

바그너는 거대한 규모의 음악을 작곡했고,

특히 금관 악기들을 즐겨 사용하였다.

심지어 호른과 트롬본 사이의 음역을 채우기 위해 새로운 악기를 발명하였는데,

이 악기는 바그너 튜바라 알려져 있다.

 

바그너는 대본에다 음악을 붙이기보

음악과 연극, 미술 등 모든 예술 분야가 통합된 작품을 만들었다.

바그너는 심장마비로 베니스 대운하 위의 Palazzo Vendramin에서 향년 71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그의 시신은 바이로이트로 되돌아와 반프리트의 정원에 묻혔다.

독일 오페라의 자존심이자 푸치니와 함께 오페라 양대산맥을 이루는 작곡가!

 바로 리하르트 바그너이다. (1813~1883)

 

 

사진출처,hedone21블로그

 

이에 반해 니체(1844~1900)의 말로는 비참하다. 10여년을 정신병원에서 보낸다. 이 모습, 사진으로 대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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