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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고통..우리는 어쩌면 불완전한 남을 통해 나를 본다.

von3000 2018. 3. 20. 2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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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십 년에 걸쳐 현명함과 어리석음이 뒤섞인 채 신물 날 정도로 살아온 삶들이다.

나는 글쓰기의 본질은 독자에 대한 경의에 귀착한다고 생각한다. 실천적으로는 마음을 다해 이야기하는 것이다.

우치다 다츠루라는 일본의 교육운동가우리가 글을 쓸 때  이미 알고 있는 것을 Print Out 하는 게 아니라고 한다. 글을 쓰는 동안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무엇을 알고 있는지 발견하는 것이라고, 이는 글을 써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이다.

 

                                                                   하인츠 코헛의 대상관계이론, 뮤지컬

 

우리는 어쩌면 불완전한 남을 통해 나를 본다. 정말 섬뜩한 말이다. 남이 불완전하다는 것은 첫째, 나의 완성도가 조금 높아질 확률은 더 많아지는 것이고, 나의 동정심과 측은지심을 발휘할 절호의 기회가 알아서 다가온 것이다.

간혹은 여기서 역전이 다가와 쥐구멍을 찾기도 하지만... 인간의 욕심과 우월 의식은 괴물의 출발선일지도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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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아!

타인의 고통이다.

희망이 필요할 때 그녀의 음악을 들으면 우울해진다. 사람을 일으켜 세우는 노래라기보다, 오히려 주저앉히는 노래다. s노래를 다 음미하고나서야 그 곳에 서 있게 하드라. 개의치 않는다. 그녀는 노래를 하지 낭송을 하는게 아니지 않는가? 그러나 한동안 지속되는 우울감을 따라가다 보면 그 너머에서 기묘한 힘이 솟아난다. ‘김윤아’(1974~ )의 멜랑콜리가 이미 나를 에워쌓는다. 아프겠지만 김윤아는 자유롭다.

울고 난 뒤에는 또 다른 실천력을 강요하지 않고 애써 사랑하라 하지도 않는다. 난 이런게 좋다. 힘 내! 가 아닌 좀 힘들어 해도 되요.’ 그래서 눈치 보지 않고 제대로주저앉아 울 수 있다. 어쭙잖은 격려로 슬픔의 이후를 함부로 말하지 않는 위로.먼저 나 자신을 위로하기 위해 음악을 한다던 그녀의 말이 증명하듯, 김윤아의 음악은 어둡고 솔직해서 불편하지만, 그래서 나를 안다.

 

꿈속에서

 

 

  타인의 고통

 

미안해

너에게 해줄 수 있는 게 그리 많지 않았어

비겁한 무력한 이런 나라서 너무 미안해

한 방울 한 방울 너의 눈을 적시던

눈물을 헤아려보네 하나 둘 한없이

너의 마음에 쌓이던 의문을 되뇌어보네

이 세상은 언제나 이해할 수 없는

모순에 가득 차 있고 사람들은 말하지

우리들은 아직 어리고 어리석을 뿐이라고

한 방울 한 방울 적시던 눈물을 헤아려보네

하나 둘 한없이 너의 마음에 쌓이던 의문을 되뇌어보네

잔인하고 슬픈 얘기들을 사람들 아무렇지 않게 해

네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너에게 상처만 준 걸 알아

미안해 너무 미안해 너의 눈물을 닦아주고파

한 방울 한 방울 너의 눈을 적시던

눈물을 닦아주고파 하나 둘 한 없이

너의 마음에 쌓이던 의문에 답해주고파. 

                                                               by. 김윤아

 

김윤아 우울

 

 

언어를 지어낸다는 것은 내적인 타자와 이루어내는 협동 작업이다.

우치다 다츠루는 무라카미 하루키‘(1949~ )소설을 쓰기 위해서는 체력을 소진하고 몸을 혹사하는 시간과 수고를 들여야 한다. 작품을 쓰려고 할 때마다 새로 일일이 땅굴을 깊이 파야 한다, 또 그렇게 새로운 수맥을 찾아 내어야 한다고 이야기한 것에 열렬히 동의한다. 우치다 다츠루(1950~ ) 하고자 했던 한마디가 있다. 역시 창작이란, 그저 머리로만 하는 게 아니라는 점, 그리고 그 끝에 결국 어떤 흐름과 만난다는 점에 깊이 동의한다.

김윤아가 노래하듯 '하나 둘 한없이 너의 마음에 쌓이던 의문을 되뇌어보네" 처럼... 가장 낮은 곳에서 하나 하나를 회상하여 쌓아 놓는 것 처럼... 김윤아도 이 흐름에 몸을 던진 건 아닐까

 

문제는 흐름을 붙잡는 것이다. 하지만 흐름을 붙잡는데는 기술과 인내가 필요하다. 그래서 글을 쓸 때 어떤 것이 오기를 기다려야 한다는 것어떤 것을 붙잡으려면 기술이 필요하다는 것을 꼭 기억해두어야 한다. 그 무슨 선택처럼 다가오는 것들도, 삶도 마찬가지이다.

 

그것이 자기 앞으로 온 메시지라는 것을 알면, 비록 그것이 아무리 문맥이 불분명하고 의미조차 불분명하더라도 인간은 귀를 기울여야 한다. 경청해야만 한다. 만약 그것을 이해할 수 없다면 이해할 수 있을 때까지 자기 자신의 이해의 틀 자체를 변화시켜야 한다. 그것은 인간의 안에 깊이 내면화된 인류학적 명령이다.

 

 

무라카미 하루키

사진출처,스푸트니크의 연인,무라카미 하루키

 

갓난아기는 아직 엄마가 하는 말의 의미를 모르지만 그 말에 적절한 반응을 한다. 그 말이 자신을 향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메시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 내용보다도 수신자라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독자는 자신에게 간절히 이야기를 전하려 한다는 걸 알게 되면, 어떻게든 그 의미를 파악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나를 찾아내가란 결코 쉽지 않다. 우치다 다츠루씨도, 김윤아씨도, 무라카미 하루키씨도...

타인을 아는 노력이 어쩌면 나를 알아가는 것은 아닐까? 김윤아가 스스로를 찾지 못해 타인의 고통을 보려한 것은 아닐까?

 

우리가 가장 생생하게 살아 있는 말을 할 때란 비록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알지 못해도 자기 안에 그 말을 듣고 제대로 이해해주는 누군가가 있다는 확신이 있을 때이다. 자기 안에 자기와는 다른 말을 사용하며 살아가는 존재가 있어 그 사람을 향해 말을 걸 때, 언어는 가장 생기가 넘친다. 가장 창조적이 된다는 말이다. 언어를 지어낸다는 것은 내적인 타자와 이루어내는 협동 작업인 것이다.

  

 

에마뉘얼 레비나스

에마뉘엘 레비나스(Emmanuel Levinas) (1906~1995)

 

그는 서구 철학의 전통적인 존재론이 서유럽의 문화나 문명의 위기와 전체주의의 근원이라고 지적한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는 데카르트의 선언으로 대표되는, 인식 주체를 중심으로 하는 존재론은 이외의 모든 타자의 인식 안으로 끌어들이며 타자의 타자성을 무시하고 동일자의 영역으로 환원한다. 그리고 모든 것을 자기중심적인 체계 안에서 재정의한다.

이런 의미에서 존재론은 모든 것을 예외없이 전체 속에 체계화하는 전체성의 철학이다. 레비나스는 이러한 존재론적 철학을 동일자의 철학’, ‘힘의 철학’, ‘자아론(Egology)’ 등으로 규정하며 비판한다. 이러한 이런 데카르트의 서구 철학은 철학이 전체성의 이름으로 개인에게 폭력을 가할 수 있는 사상적 기반을 제공했다는 것이다. (1,2차 세계대전의 이유도.. 어쩌면 여기서)

 

 

이웃

포스터,'이웃'(혹은 타자)이 누군인지, 이웃 앞에 있는 '나'는 누구인지

 

타자가 누구든 관계 없이 그의 생명을 존중하고 윤리적 관계를 맺을 때 의 유한성을 극복할 수 있다. 이처럼 레비나스에게 타자는 단지 공존해야 할 다른 자아가 아니라, 주체를 구성하고 변화시킬 수 있는 무한자이다. 서구의 전통적인 존재론에서 타자는 사고의 대상으로 에 의해 그 존재의 의미를 부여받을 뿐이었지만(내가 그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등으로 시작되는 시()처럼) 레비나스에게 타자는 에게 윤리적 책임을 갖도록 명령하고 호소하는 존재이다.

 

유태인 철학자 레비나스의 사상적 지향은 윤리학은 존재론에 앞선다(Ethics precedes ontology)”는 표현으로 가장 압축하여 표현한다. 때문에 그는 홀로코스트(Holocaust) 이후 세계의 도덕성을 끊임없이 탐색했던 철학자라는 평가를 받는다. 서구 철학의 전통에 대한 철저한 비판에 기초한 레비나스의 사상은 데리다(Jacques Derrida, 1930~2004)를 포함해 이른바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 사상가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아래 사람들이 하고자 했던 공통된  한마디가 있다.

우치다 다츠루도, 김윤아도, 무라카미 하루키도, 에마뉘엘 레비나스도....

 

고통받는 타인의 얼굴에 반응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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